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 정부/평가/논란이 있는 평가 (문단 편집) ==== 기회주의자적 [[이중잣대]] 면모 ==== 일제강점기 때 만주군관학교 및 일본육사 졸업 후 만주군 장교로서의 활동, 만주군 해산 직후에는 고국에 돌아갈 방법이 없자 광복군에 들어갔고, 해방이후 [[남조선로동당]] 입당 및 프락치로 활동 이후 깨끗히 바로 전향을 인정하고, 같은 만주군 출신 장성인 [[백선엽]]의 선처로 총살형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살아남는다[* 새뮤얼 버거 전 주한미국 대사의 보고서인 한국의 변혁(1961~1965)에서는 박정희가 공산주의자 300명의 명단을 넘겨 숙군작업을 도왔기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보고했으며, 조갑제 기자가 1989년 당시 숙군작업 방첩대장이였던 김안일씨를 인터뷰한 내용 따르면, 숙군작업을 대조하여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사람은 이재복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와 김종석 남로당 비서고, 박정희가 사형을 면하게 된 원인은 수사과정에서 박정희가 공산주의와 무관하고, 포섭되긴 하였지만 남로당 활동 경력이 전무하다는걸 알아낸 김창룡이 김안일 방첩대장에게 소개시켜주었고, 김안일이 다시 같은 만주군 출신 [[백선엽]]에게 박정희를 소개시켜주면서 선처를 부탁한 까닭에 사형판결을 피할수 있었다고 한다.[[http://chogabje.com/board/view.asp?cpage=0&C_IDX=10074&C_CC=BJ|#]] 신빙성으로 볼때 당시 숙군작업 책임자이자 박정희를 대면하였던 직접적인 관련 당사자의 증언이기에 후자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.]. 그렇지만 [[6.25 전쟁]] 당시, 정보장교였던 [[김종필]]에게 남침 징후를 보고받은 후 도주하지 않고 신설된 9사단 참모장으로서 최전선에서 참전하였기 때문에 악질 기회주의자 꼬리표를 붙이는건 무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. 이후 국군 내 사조직을 통한 [[5.16 군사정변]]의 주도하였고, 헌법 개정을 가장한 또 다른 친위[[쿠데타]]나 다름 없었던 [[10월 유신]], [[하나회]] 결성과 방치 등 일관적인 모습보단 현재 자신한테 가장 유리한 쪽을 택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비판이 있다. 남로당 경력 때문에 [[제6대 대통령 선거]]에서 [[윤보선]]에게 '사상이 의심된다'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. 그리고 이에 반박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메카시즘을 타도하자는 내용의 신문광고를 올리기도 했다. [[유신헌법|훗날의]] [[긴급조치|행보를]]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행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